서점에 가서 여러 책 목록을 보다보면, 베스트셀러 섹션에 있는 유명 작가들의 신작 소식에 눈길이 가기 마련이다. 유명 작가의 책이라 하여 반드시 내 취향에 맞으리라는 보장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유명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 문학적으로 뛰어난 작품을 읽어 마음의 양식이 될 것 같고 교양 수준도 평균적으로 맞춰지는 듯 한 착각이 들기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베스트셀러를 보던 나에게도 멈칫 하고 쉽게 책을 들지 못하는 작가의 작품이 하나 있다. 그것은 멘부커 상 수상작 <채식주의자>로 유명한 한강 작가의 신작이었다.
작가의 이름만으로도 버거운데 주제는 5.18 민주화 항쟁이었다. 얼마 전 TV에서 추모방송까지 했었던, 이미 5.18을 소재로 한 영화나 다큐멘터리까지 다수 나왔을 정도로 대한민국에서 지금 5.18 민주화항쟁은 가장 유명하고, 또 민감하며, 가슴 아픈 역사의 일면이 아니던가. 나는 한강 작가와 5.18 민주화항쟁이라는 두 조합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 것이 매우 어려운 산을 넘어가야 하는 등반가와 같은 심정이 되게 만드는 일이었다. <채식주의자>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표면적으로는 5.18민주화항쟁의 현장에 있었던 소년 동호에 대한 이야기 같다가도 그 안에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와 같은 심도 있는 질문을 독자에게 넘기고 있었다. 그래서 역시 쉽게 읽혀지지는 않는 않은 책이었다.
1980년 5월,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계엄군은 체제를 비호하고 불순한 무리를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화염방사기를 발사했다. 모든 병사들에게는 무조건 광주 시민들을 향한 폭격과 총 살상이 허락되었고, 아무런 이유 없고, 죄에 대한 추궁이나 심문조차 없이 시민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시작되는 5월 27일, 전남도청의 시민군 진압이 이뤄진 이후, 동호는 옆구리에 총을 맞아 쓰러진 정대의 시신을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도청 상무관을 찾았고 시신을 수습한다. 하지만 그 곳은 계엄군이 주둔하던 곳, 희생자들의 주검을 지키기 위한 시민군들의 의지와 계엄군은 이내 무력 앞에 부딪히고 결사항전으로 치달으며, 동호는 그 소용돌이의 중앙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 동호, 정대, 그의 누나 정미, 어리고 어린 소년, 소녀들이 그렇게 죽어가고, 폭력과 성폭행을 당하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음에도 그 누구도 총구 앞에서 그리 해서는 안 된다고 말조차 하지 못했던 과거를 회상하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중심은 정대, 그리고 동호라는 두 소년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동호가 정대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갔던 그 도청 안에서의 한 장면을 둘러싼 서로 다른 인물들의 각기 다른 시점을 둘러보는 느낌으로 전개된다. 첫 장에서는 친구 정대를 두고 도망갔던 자신의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시신을 닦는 일을 하며 정대를 찾는 동호 ‘너’를 바라보는 사람으로, 두 번째 장에서는 자신의 죽어 썩어가는 시체를 바라보며 자신의 죽음에 슬퍼하는 사람을 지켜보는 정대의 영혼의 입장에서, 세 번째 장에서는 동호와 함께 시신을 수습하던 은숙이라는 인물에게서, 네 번째 장에서는 총을 들고 도청에 남아 계엄군과 싸우려했던 한 남자의 시점에서, 다섯 번째 장에서는 동호, 은숙과 함께 시신을 수습하던 성고문의 피해자 임선주,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 동호의 엄마, 형의 시점에서. 그렇게 나는 뜨거운 광주의 5월, 도청의 안팎에서 동호와 정대를 바라볼 수 있었다.
이제껏 한 가지 일을 이렇게 다양한 시점에서 묘사했던 작품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각 장에서 절절히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담아내는 그들은 그 날의 도청에서 서로 다른 곳에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분노와 억울함, 슬픔은 누구 할 것 없이 너무나 처절한 것이었다. 왜 동호가 정대의 시신이라도 수습하기 위해 다시 위험한 도청에 가야 했는지, 왜 계엄군과 싸우기 위해 총을 들고도 쏘지 못하고 계엄군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어야 했는지, 왜 자신의 아들이, 동생이 광주에서 그렇게 계엄군의 총구 아래 죽어갔다는 것을 서울에 살던 형은 알 수조차 없었는지, 민주화항쟁에서 스러졌던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의 죽음을 다루고 있는 듯 하면서도 이 여섯 가지 시점, 여섯 명의 사람의 이야기에는 광주 민주화항쟁이라는 사건의 본질 모두가 담겨져 있었다. 그래서 총 6장의 이야기를 모두 읽고 나면 내가 마치 그 도청 안에서 계엄군을 경계하며 사랑하는 나의 가족의 시신을 찾아 헤매는 듯한 기분까지 들곤 했다. 그리고 나에게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한 한강 작가의 표현력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뛰어난 표현에 감탄 하며서도 일부 장면에서는 읽으면서 그 당시의 장면이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것 같아 읽기조차 힘든 부분도 있었다. 특히 ‘밤의 눈동자’ 장에 나오는 임선주의 이야기는 얼마 전 TV뉴스에서도 기사화 되었던 5.18 민주화 항쟁의 진압을 맡았던 계엄군의 민간인 성폭행 이야기를 떠오르게 했다. 당시 광주는 그야말로 무법지대였고, 오랜 군사정권의 영향으로 군인들의 득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대였던 것은 알고 있었고, 계엄군이 시민을 폭행하는 과정에서 무자비했던 것 역시 이전에 보았던 사진자료 등으로 보았던 것이지만 그렇게 다수에 의한 성폭행이 있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충격적인 기사였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그 임선주의 이야기는 그 기사가 나에게 주는 사실성과 더해져 마치 임선주라는 인물이 진짜 이런 일을 눈앞에서 당했다고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일제 시대 위안부 피해자들을 대하던 일본군에게만 욕할 일이 아니었나. 라는 생각에 같은 나라의 국민이라는 사실조차 수치스러워지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그렇게 참혹했던 광주의 5월 속에서 진수, 선주, 은숙, 그리고 동호의 어머니는 살아남았다. 아들이 죽었는데도 살아야 했고, 살과 뼈를 도륙하는 고문을 받고도 살았다. 하지만 그들이 살아남았다는 게 다행일까. 아니면 불행이었을까. 죽음보다 못한 마음으로 살아야했던 자들에게는 남겨진 시간 역시 지옥일 뿐이었으리라
내가 작가였다면, 이런 말을 듣고 어떤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어떤 글을 써야 할지 아마 글자 하나하나마다 중압감이 느껴져 옮길 수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이 있던 당시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언론통제와 정치적 이유로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못했던 진실, 마치 체제에 반발하고 공산주의에 물든 불손한 무리처럼 취급받았던 당시 광주 민주화항쟁의 피해자와 피해자가족들, 나는 수많은 것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내가 그 시대에 살았던 것은 아니었으며, 설령 살았다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저 방관하고 모른 체 살아갔던 그 모든 시간들이 그들에게 죄를 지은 거 같은 죄책감이 함께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강 작가님은 그런 중압감을 더 명확한 진실로, 더 간절하고 참혹하게, 더 진실 되게 글로 옮기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 마음이 마치 글에서 느껴지는 것 같아 나는 그저 책을 읽는 것에도 하나도 잊지 않겠다는 신념을 담아 읽었다. 그것만이 그저 방관자였고, 무지했던 내가 그 분들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이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내가 가져야 할 의무이자 사명이라는 생각을 나는 이 가슴 아픈 희생의 이야기를 읽으며 다시금 새기게 되었다.
'독서활동에 추가하면 좋은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사를 바꾼 12가지 신소재 - 사토 겐타로 (0) | 2023.03.18 |
---|---|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 홍세화 (0) | 2023.03.16 |
클라우스 슈밥의 제4차 산업혁명 THE NEXT (2) (0) | 2023.03.01 |
클라우스 슈밥의 제4차 산업혁명 THE NEXT (1) (0) | 2023.02.27 |
메타버스 사피엔스 - 김대식 (0) | 2023.02.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