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활동에 추가하면 좋은 책

독일어 시간 - 지크프리트 렌츠

by 현서엄마 2023. 3. 21.
728x90
반응형

가깝고도 먼 나라흔히 그런 나라라면 일본을 떠올리지만 나에게 그런 나라는 또 하나, 독일이 있다. 우리와 같이 분단과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대립을 겪었던 나라, 하지만 그 폐허가 된 전쟁의 상흔 위에 다시 나라를 일으켜 세운, 우리는 전쟁을 겪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일은 원칙과 규칙이 엄격하게 지켜지는 다소 엄격한 나라라는 이미지 또한, 가지고 있다. 맥주를 좋아하고 수많은 음악가들을 배출하였으나 왠지 예술적이고 감성적이라기보다는 원칙적이고 이성적이며 논리적인 나라라는 이미지가 강하다고 해야 할까. 분명한 것은 같은 유럽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와는 전혀 다른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라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최근, 특히 이런 독일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관심이 커지는 계기가 있었는데 바로 통일 문제 때문이었다. 통일이 최근 1-2년 사이에 급진적으로 이뤄질 것 같은 대내외적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독일처럼 평화적인 통일을 이뤄내고 또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사회, 경제적 혼란을 현명하게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세계대전의 피해 국가였다. 하지만 독일은 패전국으로서 전범국의 오명을 쓰고 1940-50년대를 맞이하였다. 막 세계대전이 끝났을 당시, 유럽, 아니 세계 어떤 국가도 독일이 다시 이 오명을 벗고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만큼 전후 독일의 모든 것들을 피폐하고 처참했고, 유럽의 어느 국가도 그들을 도와줄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천 년의 인류의 역사 중에서 유일하게 세계대전이라고 명명되는 전 세계를 뒤흔든 큰 역사인 전쟁은 딱 두 차례였다. 전쟁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한 희생을 불러왔고, 우리는 아직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50여년이 넘는 세월 후에도, 그 상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을 곁에서 보며 살아가고 있다. 가깝게는 소녀상 옆에서 매주 집회를 여시며 자신들의 아픈 역사를 잊지 말아달라고 말하시는 위안부 할머님들. 그리고 세계 곳곳에는 가족을 전쟁 속에 잃고, 상처를 끌어안고 사는 많은 피해자들이 있다. 그리고 독일에도 이러한 피해자들과 가해자들이 뒤섞인 상태로 1950년대를 이제 막 맞이하려 하고 있었다.

 

지크프리트 렌츠그 전후의 시대에 소설가로 살아가고 있던 이 작가가 보여주는 독일은 그런 혼란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 전체주의의 흔적, 아직 사라지지 않은 권력과 정부의 압박, 그 권력에 복종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가치와 이념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 상태에서 맹목적으로 강요되던 국가주의와 애국심은 모든 예술과 창작과 새로운 생각들을 억압하고 억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러하듯 민중은 국가의 의도대로 모두 맞춰지는 하나의 존재가 아니다. 수없이 가지를 뻗고 자신의 고유 의지를 가지고 있는 각각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정자들의 정치적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각자 자신들의 삶에서 얻은 성찰과 가치관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다. 마치 이 소설의 주인공 중 하나인 지기의 아버지 예프젠이 공무원이라는 자신의 입장과 의무관, 국가관에 따라 모든 그림을 찾아 불태우고, 모든 창작을 억압하고, 하물며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의 그림마저도 압류하고서도 아무런 죄책감조차 받지 않는 것처럼, 그런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의 모습은 마치 내가 이전에 보았던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의 피의자 심문대에 서 있던 수많은 전범들의 모습을 상상하게 했다. 아무런 자유 의지도, 자신의 신념도 없이 그저 국가의 부름과 명령에 따라하면 그것이 옳다고 믿어버리는 사람, 마치 어떤 종교에라도 빠져든 것처럼 자신의 행동에 아무런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하는 전범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그들이 소름 돋게 무섭다기보다는 어떻게 저런 강한 신념을 믿을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신기함을 가졌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있는가하면 아직도 남은 양심과 자신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감정, 그리고 자유로운 세상을 향한 자의식이 남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화가 난젠 같은 사람도 있는 법이고 말이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난젠과 예프젠, 두 사람으로 극단적으로 구분지어 보여 지는 이 예술과 이념의 충돌 사이에서 그저 관망하고, 따르고, 자신만의 계획을 세우는 화자 지기 같은 사람도 있는 법이다.

이 책에서 그런 두 사람으로 대표되는 충돌은 예프젠보다는 난젠의 예술과 창작, 자유를 상징하는 그림 쪽이 옳은 방향인 것처럼 쓰여 지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독일의 이념적 문제에 대해 옳고 그름을 나누고 토론을 하자는 말을 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그저 전후의 독일 사회에서 일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갔는지, 그 삶이 얼마나 힘들고 혼동스러운 것이었는지 담담하게 소년 지기의 시선으로 그려낼 뿐이다. 그것은 어린 소년 지기의 입장에서 늘 강압적인 태도로 자신을 억압하고, 아무런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 엄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예프젠이, 그리고 당시의 독일 정부가 상징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극히 어른의 입장에서 보며, ‘내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나는 과연 어느 쪽에 가까웠을까?’ 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나는 예프젠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난젠처럼 나의 모든 것을 두려움 없이 표현해 그려낼 만한 용기를 가지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념이나 정치적인 싸움 같은 것을 제외하고, 거저 예프젠이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의무에 대한 강박관념에 집중해서 보면, 그 나름대로는 자신의 인생과 가족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믿음을 실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쟁 이후의 패전국 국민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폐허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본능만을 살려야 할 것 같은 위기감을 사람들에게 가지기에 충분하다. 예술을 하거나, 국가에서 금지하는 창작을 하거나, 그런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타인의 입장에서는 멋진 의지로 보여 질 수도 있으나, 당대를 살아갔던 사람의 눈에도 그러했을까? 아니, 오히려 난젠처럼 국가에 반역하며, 자신의 그림이 마치 자유의 상징이라는 것처럼 고집을 꺾지 않는 것이 어리석을 일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이념이나 정치사상 같은 것보다 일반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안위와 생활의 안락 이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지기는 자신만의 의지로, 아버지가 의무라고 말하며 자신에게 내려주었던 독일어 시간의 공포에서 스스로 벗어나, 난젠의 그림을 숨겨줌으로서 자유를 향한 자신의 의지를 표현한다. 그리고 그런 지기의 의지어린 말 한 마디는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를 대변하는 듯 했다. 바로 의무를 다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말이다. 그리고 나는 지기가 숨긴 그림 안에 담겨진 뜻을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보았다.

반응형

댓글